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타케나카 시게하루 (문단 편집) == 생애 == 사이토 가문의 가신이자 이와테성 성주인 다케나카 시게모토의 아들로, 1544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시게모토는 1560년에 별세했고, 이 때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와테성 성주가 되어 본격적으로 사이토 가문을 섬기기 시작했다. [[미노 삼인중]]의 한 명인 안도 모리나리의 사위이기도 하다. 당시의 사이토 가문 다이묘인 [[사이토 요시타츠]]는 부친 [[사이토 도산]]에게 모반을 일으켜 당주에 오른 자였다. 자신의 장인이었던 도산을 죽인 요시타츠를 [[오다 노부나가]]가 가만히 둘 리 없었지만, 요시타츠는 미노에 침공해오는 오다군을 몇 번이고 패퇴시켰다. 그러나 요시타츠는 다이묘에 오른지 몇 년 지나지 않아 1561년에 병사했고, 그의 아들인 타츠오키가 13세의 나이에 후사를 잇게 되었다. 그러나 타츠오키는 나이도 어렸고 잘 보아도 범재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561년 7월, 오다군의 미노 침공을 복병전술로 패퇴시킨 것이 바로 시게하루이다. 1563년에 있었던 오다군과의 전투에서도 사이토군은 시게하루의 전술 덕분에 승리했다. 그럼에도 주군 타츠오키는 [[주색]]에 빠져 정무를 돌보지 않았고 일부의 측근만을 총애하며 정작 시게하루나 미노삼인중은 멀리하기 시작했다. 시게하루는 이런 타츠오키를 일깨우고자 1564년 2월에 겨우 16명만을 이끌고 주가의 거성 이나바야마성(稲葉山城)을 하루만에 탈취했다. 노부나가는 이 일을 알고 나서 성을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시게하루는 이를 거부하고 8월에는 스스로 이나바야마성을 타츠오키에게 반환했고, 이후에는 스스로 사이토 가문을 떠나 [[아자이 나가마사]]의 객원 신분으로 약 1년간을 보내다 원래의 영지인 이와테로 돌아갔다. 1567년, 노부나가의 침공을 받고 사이토 가문은 멸망했다. 노부나가는 낭인으로 지내던 시게하루를 등용하고자 했다. 미노 침공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노시타 도키치로(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른바 "삼고의 예"를 보여 시게하루를 등용하고자 했고, 시게하루가 히데요시의 재능을 꿰뚫어보고 오다의 가신으로 일하는 것은 꺼렸으나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는 것은 승낙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나 이는 후대에 와서 미화/창작된 일화인 것으로 보이고, 현재의 통설은 동생 시게노리와 함께 노부나가의 직신으로 등용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노부나가 포위망이 만들어지자 시게하루는 이전에 아자이 가문에 몸 담고 있었던 경력을 살려 설득역할을 맡게 되고, 아자이측의 두 개 성을 설득하여 오다측으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직후에는 아네가와 전투에서 안도 모리나리의 부대에 참전했고 전투가 끝난 뒤에는 요코야마성에 히데요시와 잔류하게 되어 이 때부터 히데요시에게 조력해 히데요시를 오다 가문의 중신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일을 했다. 히데요시가 오다군 츄고쿠 원정 총사령관에 임명되자 시게하루도 히데요시를 따라 원정길에 나선다. 1578년에 우키타 가문의 성 하치만야마성(팔번산성)을 설략으로 빼앗아 노부나가에게 칭찬받았다. 같은 해 [[아라키 무라시게]]가 노부나가에게 모반을 일으키자(아리오카성 전투), 마음을 돌리게 하기 위해 [[구로다 간베에|구로다 요시타카]]가 아리오카성으로 향했지만 성내에서 포박당했다. 요시타카의 내통을 의심한 노부나가는 히데요시에게 요시타카의 장남 [[구로다 나가마사|쇼쥬마루]][* 쿠로다 나가마사의 아명]를 죽일 것을 명령했다. 이에 시게하루는 직접 "그 일 제가 받들겠나이다"라고 고하며 쇼쥬마루가 있던 나가하마성으로 향해 그를 자신의 영지인 보다이산성(보제산성)으로 옮기고 히데요시에게는 가짜 머리를 바쳐 쇼쥬마루의 목숨을 구했다. [* 후에 구출된 요시타카는 이 일을 굉장히 감사히 여겼지만, 때는 이미 시게하루가 병사한 뒤였다.] 1579년 4월, 미키성을 포위하고 있던 중에 쓰러졌다. 히데요시는 시게하루의 병세를 걱정하여 교토로 돌아가 요양하도록 권했으나 시게하루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 "무사인 몸, 전장에서 죽고 싶다"고 간청하였고, 결국 6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35세. 사인은 폐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몸이 약하고 작은 체구에 얼핏 보면 여성과도 같다'[* "그 용모는 부인과도 같아"라 써져있다]고 전해지고, 출진시에도 말에 탄 채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항상 볼품없는 말을 타고 다녔는데 이를 본 히데요시가 "자네 정도의 사람이 그런 말을 타고 다니나?"라고 묻자, 시게하루는 "명마를 타고 다니면 전투 중에 명마를 아까워해서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게 되니 이런 말을 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중국 [[한나라]]의 '[[진평]]'과 자주 비교되어 '금남목(今楠木)'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남목'이란 '楠木'. 즉, 일본 [[남북조시대(일본)|남북조시대]]의 영웅이자 군략의 천재였던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를 뜻하며, 풀어쓰자면 '오늘날의 구스노키 마사시게' 라는 뜻이다. '금공명(今孔明)'이라는 칭호는, [[삼국지]]에서 [[유비]]가 [[제갈량]]을 맞아들일 당시의 삼고의 예 이야기와 함께 끼워맞춘 것으로 보인다. [[무공야화]]에서는 "온화하고 기품이 있으며 자비로운 눈을 지녔고 학재도 있어 군서에 해박하다"고 하며 전장에서는 항상 "태연자약한 자세"로 적과 대치했다고 전한다. [[태합기]]나 [[상산기담]]에 따르면, 부인과 같은 용모 때문에 괄시받아 주군을 비롯한 가신단에게 괄시받았고 심지어는 가신인 사이토 히다노카미가 채 위에서 그에게 조롱하며 얼굴에 소변을 '''쏜''' 일마저 있었다고 한다. 며칠 후 히다노카미가 타츠오키의 방 옆에서 숙직 임무를 맡고 있었던 날, 시게하루는 성에 머물고 있던 동생 시게노리의 간병을 이유로 등성해 히다노카미를 '''[[끔살]]'''하고 타츠오키 및 가신단 대부분을 추방해 이나바야마성을 빼앗았다고 한다. [[뒤치기]]에 제대로 당한 셈. 젊은 나이에 진중에서 병사한 것과 죽을 때 까지도 책략을 냈던 것을 보면 조조의 참모였던 [[곽가]](38살로 사망)와 이미지가 겹치기도 하지만, 성품이 개차반이었던 데다가 품행이 좋지 않았다는 곽가와는 달리 온화하고 품행이 단정했다는 점에서는 곽가와는 인상이 사뭇 다르다. 나름 인지도가 있는 인물이지만, 요절한 탓인지 1만 석 이상인 [[다이묘]]는 된 적이 없다. 사촌동생이 히데요시를 섬기면서 다이묘가 되었으나 그의 아들 대에 [[카이에키]]당해서 끊어졌다. 아들인 타케나카 시게카도는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지리적으로 서군에 붙어야 좋을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그냥 서군에 붙는 게 유리한 정도가 아니라, 만일 저 상태에서 서군이 이겼다면 '''망하기 딱 좋은 위치'''였다. 전장인 세키가하라 일대가 바로 자기 영지였는데다가, 세키가하라 서쪽에는 바로 서군 총대장인 이시다의 22만석 영지와 서군 주요 영주인 오타니의 스루가 5만 석 영지가 나오고, 반대쪽인 동쪽으로 가도 바로 서군 주요 집결지였던 오가키 성을 위시해서 서군측 영지밖에 안 나온다. 참고로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타케나카 가문의 영지 석고는 단 5천 석에 불과했다.] 동군에 붙는 안목을 발휘하여 영지를 보전했다.[* 그러나 동군에 협력했음에도 포상은 그가 잡아온 고니시 유키나가의 도검 정도 뿐으로 끝내 다이묘는 되지 못했다.] 그리고 뒷날 시게카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기인 '도요카가미'를 저술하였다. 이후 타케나카 가문은 에도 시대 내내 최상급 하타모토로서[* 가문의 격은 코타이요리아이(交代寄合)로, 다이묘와 같이 참근교대를 하도록 되어 있는 하타모토 가문이다.] 막부의 중신으로 이어졌으나, 마지막 당주인 시게카타가 [[보신 전쟁]]의 첫 전투인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졸렬한 지휘로 패전의 원흉 중 한 명이 되면서 결국 1867년에 영지를 몰수당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